[[2025-07-12|25-07-12-17]] one review from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otmfl&logNo=140192678998 소설의 도입부, ‘그녀’로 대변되는 한 여인은 상상력이라고는 없는 그저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다. ‘추워요’ ‘왜이래요?’ ‘어유, 장난꾸러기’ 그녀는 두 마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주인공 남 성의 시선으로 비춰진다. 주인공은 심지어 그녀를 비웃는다. ‘넌 역시 신파야’ 하고. 하지만 충동적인 무언가에 의해 둘은 트렁크에 갇힌다. 트렁크라는 공간이 소설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는다. 두 여자의 대비 성현은 상수도고 가희는 하수도다. 가희는 자신을 위해 세 번이나 낙태를 했으며 쾌락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성현은 ‘나’의 성역이다. 성현은 절대 나의 불륜 사실을 알면 안 된다. 왜냐면 알게 된다면 지금껏 쌓아왔던 ‘나’의 이미지가 무너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희는 상관없다.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을 아는 여자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있는, 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각자의 치부 같은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하고 필요한 존재다. 굳이 소설에서의 메타포대로 이분하자면 가희는 ‘나’의 실체에 가까우며 성현은 ‘이미지’에 가깝다. 성현이 수채화 라면, 즉 ‘나’가 쌓아나가고 있는, 바람직한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가희’는 실패한 유화다. ‘내’가 싫어하는 스스로의 실체를 덮어버리고 배출해버리는 대상인 것이다. 성현이라는 이름의 거울 우리는 항상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막상 나 자신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의 아내 성현을 떠올리면 선명하지 않다고 말을 한다. 아무튼 성현은 주인 공의 나르시시즘을 반영한 거울이자 자아의 확장물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는 나르시스트일 수록 오히려 정작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과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와 괴리가 큰, "껍 데기’처럼 사는 사람이라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기에 거울 속에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나에 도취되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나'가 그러했다. 다리 사이의 틈새에 앉을 때도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죽음으로부터의 사색>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와는 다른 실체를 포장하려는 노력이다. 반대로 단정한 숙녀의 이미 지, 첫경험인줄 알았던 지리산에서의 정사,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상수도, 정갈하고 상처입지 않은 백색의 대지. 이 모든 건 ‘나’로 인해 만들어진 성현의 ‘이미지’이다. 즉 ‘나’는 아내 성현에게 자신의 이 상적 자아상을 투영하고 그걸 통해 ‘나’는 나르시즘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거울 속 ‘나’ 또한 허상이기에 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거울이라는 이미지가 반들반들하여 있는 그대로를 비추지만 쉽게 깨 어진다는 속성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성현이라는 거울 속 ‘나’는 깨어진다. 가희에 의해 말이다. 가희는 죽음에 다다른 순간 사실은 성현이 동성애자이고 ‘나’와 결혼한 이유는 가희가 ‘나’를 좋아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거울이 백설공주가 더 예쁘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렇게 마녀는 파멸한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거울은 왜곡이다, 아니 거울은 없다-며 성현이 자신이 만든 이미지라 는 걸 확인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것이다. 결국 나르시시즘 즉 거울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듦으로써 치부를 은폐하고 타인의 시선을 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울은 깨어진다.